오늘부터 숭대시보의 지면 한 칸을 빌려 ‘슬기로운 언어생활’을 연재합니다. 앞으로 여러분과 함께 단어와 문장 바르게 쓰기, 우리 사회의 차별 표현, 모호한 경계 표현, 모순성 단어와 표현, 말하기의 원리와 방법, 남자어와 여자어, 남녀의 화법, 한국인의 공손 화법, 울타리 표현(hedge expressions), 사물 존대 현상, 자기소개서 잘 쓰는 방법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비언어적인 방식도 실제 의사소통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우리는 주로 언어적인 방식, 즉 말하기와 글쓰기를 통해 상대방과 소통합니다. 그 목적 또한 정보 전달, 관심 표시, 불만 표출, 요청, 명령, 설득, 칭찬, 사과, 격려 등 매우 다양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말과 글이 상대방에게 의도적이든 비의 도적이든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 지려면 나의 생각과 의도가 상대방에게 오해와 막힘없이 잘 전달되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원하는 대로만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기는 합니다.
 
  본래 의도와 다르게 전달되는 사례를 하나 소개합니다. 대구의 모 경찰서 관 할인 고성지구대에서 내건 플래카드에 “우리 동네 성폭력범은 우리가 지키겠습니다.”라고 씌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장이 자연스럽게 느껴지십니까? ‘ 지키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여러 뜻풀 이가 나와 있습니다. 그중에서 1번 뜻풀 이는 ‘재산, 이익, 안전 따위를 잃거나 침 해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거나 감시하여 막다’입니다.
 
  ‘지키다’ 앞에는 소중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정말로 보호하고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 와야 자연스럽습니다. 예컨대, “성을 지키다.”, “부모님의 유산을 지키다.”, “군인들은 목숨을 다해 조국을 지켰다.”, “개는 집을 잘 지키는 동 물로 알려져 있다.”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성폭행범을 지키겠습니 다.”는 성폭력범을 감시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보다는 오히려 성폭력범을 보호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 습니다. 마찬가지로, “도둑을 지키겠습 니다.”와 “강도를 지키겠습니다.”도 같은 이유로 굉장히 어색합니다.
 
  이번에는 책을 한 권 보겠습니다. 엄기호 씨가 쓴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를 다시 한번 머릿속에 떠 올려 봅시다. 발음해 보셔도 좋습니다. 이 책 역시 제목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 집니다. 글 읽기를 멈추고 잠시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아무도 남을 돌보지 않는다/않았다.”는 문제도 없고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왜 위의 책 제목은 어색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해당 문장이 명령문이고, 명령문은 청자(듣는 사람)의 존재가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문장 끝에 있는 ‘마라’는 명령형 서술어입니다. 부정을 뜻 하는 ‘말다’의 ‘말-’과 직접 명령을 뜻하 는 어미 ‘-아라’가 결합할 때 받침 ‘ㄹ’이 탈락하면 ‘마라’가 됩니다. 직접 명령하 려면 대화 상황에 청자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너는) 남을 돌보지 마라.”는 그래서 가능합니다. 그러나 ‘아무도’는 청 자가 ‘아무도 없’도록 ‘0(zero)’으로 만들 어 버립니다. 즉, ‘아무도’는 청자를 0명 으로 만들지만 ‘마라’는 청자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서로 충돌하게 되고, 이 때문에 문장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 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말을 하고 글을 쓸 때 의식하고 생각하고 되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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