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사상(中華思想)은 중국인의 자부심을 일컫는 말이지만 점점 좁아져가는 지구촌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참으로 어리석게 들리는 말이다. 난 중국 전문가가 아니라서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다른 뜻을 헤아릴 수는 없지만, 한때나마 중국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을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으로 매도했던 것은이기적이고 무지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자신들과 다르면 모두 오랑캐가 되는 것인가. 특히 삼국지의 제갈량과 인연이 깊은 남만은 야만적인 식생활을 즐기는 미개한 존재들로 묘사되었다. 지금의 운남성을 포함한 인도차이나 반도 북쪽이 남만 지역이라고 하면 중국을 모질게 괴롭혔던 베트남의 북부가 포함될지도 모르겠다. 베트남은 송(宋), 원(元), 청(淸)왕조의 침입을 당당히 물리쳤고, 중화인민공화국 덩샤오핑의 군대도 중월(中越)전쟁에서 비참하게 패퇴한 바 있다. 중화가 아닌 ‘월화(越華)’가 느껴지는 베트남에 왔다. 그것도 응우옌 왕조의 고도(古都)이자 자금성(紫禁城)이 있는 ‘훼’에 어렵사리 도착했다. 베이징의 자금성을 조롱이라도 하듯이 똑같은 이름으로 이 도시에 존재하는 황제의 공간을 보기 위해서였다.

   중국에 천자(天子)를 칭하는 황제가 있는 한 제후국의 왕들은 절대 황제라고 불릴 수 없었다. 제후국의 왕이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하는 순간 그것은 군신관계를 끊는 반역뿐만 아니라 처절한 보복을 불러왔다. 그러나 베트남은 황제국이 되었으며, 그들의 왕들은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죽어서는 엄청난 규모의 황제릉에 묻혔다. 훼를 수도로 삼았던 응우옌 왕조는 이 도시에서 143년간이나 번성하며 13명의 황제를 배출했다. 중국의 손아귀에서 500년 내내 신음하던 조선과는 전혀 다른 진정한 승전국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豪奢)였을까.아직 관광지로서의 인프라가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아서 비록 오토바이를 타고 또 발품을 팔아서 돌아보는 민망(Minh Mang), 뜨득(Tu Duc) 황제릉이었지만 내 맘 속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시원함이 터져 올라왔다. 추측컨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중국의 경제적 보복이 생각나서 그랬던 것은 아닐는지. 베트남인들은 20세기 초까지 사용하던 한자마저 버리고 로마자를 기본으로 하는 현재의 베트남어를 만들어 누구라도 쉽게 글을 배우게 했다. 이곳에서 짧은 시간이지만 민족주의자가 되는 나.

 

   훼에서 놓쳐서는 안 될 장소가 있다. 몇 개의 황제릉을 과감히 포기해서라도 꼭 가볼 곳은 꿕혹(Quoc Hoc,國學)이다. 이데올로기를 개입시켜 생각하면 호불호(好不好)가 갈리는 사람이지만 베트남을 외세의 침략에서 지켜낸 국부(國父) 호치민이 공부했던 학교다. 호치민은 꿕혹의 교정에서 훗날 그가 맞닥뜨린 베트남 혁명과 전쟁의 암운을 예상했을까. 교정에 세워진 그의 동상과 붉은 색의 베트남 국기는 마지막 왕조였던 응우옌 왕조의 영화(榮華)와 격렬하게 섞여몽환적인 감정마저 불러일으킨다. 훼는 누군가 주변에서 베트남어로 ‘어즈버 태평연월’을 읊조리고 있는 것과 같은 도시다.

   우리의 박항서 감독이 한국의 인기를 상한가로 올려놓은 요즈음, 너무 많아 다 가보지 못한 각기 다른 모습의 황제릉과 피곤해서 미처 못 봤던 야시장을 둘러보러 이 도시로 다시 떠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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